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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악의 치욕 사건 1950 월드컵 처참한 패배 사건

by 디디도도뽀닥 2022. 5. 9.
 


브라질에서 축구란 단순히 공놀이를 넘어 삶으로 여겨진다.

 
태어나서 두발로 걷는 순간부터 브라질인들은 공을 차고
 
남자든 여자든 살면서 어느 정도 축구를 해봐야 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뭐 그렇기에 브라질은 카나리아 군단이라 불리우며 세계 축구계의 커다란 족적을 남긴
 
강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브라질과 브라질 국가대표팀에게 거의 국치일 수준의 치욕을 겪은 사건이 있으니....
 
 
 
 
 
 


2차 대전 종전 후,  1938년 대회를 끝으로 잠정 중단된 월드컵은
 
12년 만에 다시 개최될 수 있었다.
 
 
2차 대전 때문에 유럽 전역이 개박살이 난 상황이었기에
 
축구를 좀 치면서도 나라가 멀쩡한 나라는 남미가 유일했고
 
사실상 단독후보로 나온 브라질이 개최지로 선정됨으로써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이 개최된다.
 
 
 
 
 
 


당연히 사람들의 삶 자체인 축구, 그것도 축구계의 가장 큰 행사인 월드컵을 개최하게 된
 
브라질 정부는 월드컵을 대비해 당시 수도였던 리우데자네이루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축구계의 메카를 만들겠다고 공표한다
 
 
수만명의 노동자가 건설에 동원되었지만 대회직전은 고사하고
 
무려 대회 진행 중에도 공사하여 결승전 직전에 완공된 경기장이 있었으니
 
 
바로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
 
마라카낭 경기장이다.
 
 
 
 
 


당시 기준으로 무려 20만석의 관중석을 가진 크고 아름다운 경기장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경기장이었기에
 
 
현재까지 축구계를 넘어 브라질 스포츠의 성지이자
 
남미 최초 올림픽의 개최식이 열린 올림픽의 성지이기도 하다
 
 
 
아무튼 마라카낭 경기장은 대회 중에도 공사를 계속해서 결승전 직전에서야 완공되게 된다
 
 
 
 
 
 
참고로 이 때 브라질 홈팀 유니폼은 지금 같은 노란색이 아닌 흰색이었다 (기억해두셈)
 
 
이런 거대한 경기장을 지을 정도로 브라질은 정부든 국민이든 그 열기가 대단했고
 
실제로도 브라질은 거의 우승 확정 급이었는데
 
 
 
독일은 전범국이라 대회 출전 박탈
 
이탈리아는 대표팀 주축이 거의 다 사망한 토리노의 비극 때문에 사실상 우승전력이탈
 
아르헨티나는 희대의 앙숙인 브라질에게 개최지를 빼았겨서 보이콧
 
당시 최고의 강호인 헝가리는 나라가 공산화되어서 일단 불참선언
 
프랑스 역시 나라사정이 말이 아니어서 대회 직전 기권선언 등
 
 
 거의 모든 우승권 팀들이 죄다 불참, 반신불수가 된 상황이었고
 
 
 
 
 


그나마 브라질에게 위협이 될 만할 팀으로는
 
축구종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잉글랜드
 
초대 월드컵 우승국인 우루과이,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 정도였다
 
 
근데 말이 위협이 되는 팀이지, 사실상 거의 브라질 우승급으로 전력차가 심하게 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월드컵은 개최되었고, 여기에 브라질에게 희소식이 들려왔는데
 
(자칭) 축구종가라고 자부하던 잉글랜드가
 
대표팀 주전이 죄다 한국으로 파병 간 미국에게
 
1 대 0으로 참패한 것이다.
 
 
 
 
 
 

득점자 조 게이텐스는 미국 대표인데 영어보다 스페인어를 더 잘하는ㅋㅋㅋㅋ


심지어 미국측에서 득점한 선수는 조 게이텐스로 아이티 출신의 불체자였다;;
 
거기에 미국 대표팀 대부분이 ㄹㅇ 투잡을 뛰던 사람들인데
 
고교 교사, 장례식장 영구차 기사, 접시닦이, 우편 배달부, 심지어 주축은 대학생들이었다....
 
 
아무튼 잉글랜드는 이렇게 급조된 팀에게 일격을 쳐맞고
 
처참하게 대회에서 탈락하게 된다.
 
 
브라질 입장에서는 당시 피파랭킹 1위인 잉글랜드가 뭔 듣보잡 팀에게 쳐맞고
 
떨어졌기에 자국의 우승확률은 거의 99프로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아무튼 조별예선이 끝이났는데,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결승리그 방식으로 우승팀을 정했다'
'
4개의 조에서 1위를 한 팀들이 모여 리그를 치루고
 
승점이 가장 높은 팀이 우승하는 형식이었는데
 
 
당시 결승리그 팀들은 브라질 - 스페인 - 스웨덴 - 우루과이 였다
 
 
 
 
 
 


우승권 팀들이 알아서 자멸하는 바람에 브라질의 독주를 막을 팀은 거의 없었다.
 
1경기 스웨덴 전을 7 대 1
 
2경기 스페인 전을 6 대 1로 격파하며
 
사실상 나름 강호였던 스페인, 스웨덴을 도륙내어버렸고
 
마지막 남은 리그 상대는 우루과이였다.
 
 


 


브라질의 팬들은 브라질의 첫 월드컵 우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그야말로 강호 스페인, 스웨덴에게 13골을 넣어버려 박살을 내어버렸고
 
 
사실상 우루과이전은 무승부만 해도 우승을 할 수 있었고
 
당시 우루과이의 전력도 브라질과 비교를 할 수 없었기에
 
 
브라질 팬들 뿐만아니라 전세계의 축구 팬들은 브라질의 우승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우루과이 팬들도 야 2등도 잘한거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하지만 문제는 이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서 거의 설레발 수준으로
 
브라질의 우승을 기정사실화 했다는 건데
 
 
브라질 신문 대다수와 팬들은 "어차피 우승은 브라질", "우루과이 촌놈들은 그저 우승의 들러맄ㅋㅋㅋㅋ"
 
라는 논조의 기사를 띄우며 기가 막히게 설레발을 쳐댔고
 
 
브라질 최대 언론사는 "경☆세계 챔피언이 바로 여기있닼ㅋㅋ☆축"라는 기사를 송출했으며
 
당시 샴페인 판매가 역대 최고 수치였고
 
 
브라질 축협에서는 우승메달, 우승 표창장, 우승 기념 노래까지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결승전이 열릴 리우데자네이루 시장인 안젤루 모라이스는
 
 
"브라질 선수들이 나는 토너먼트의 승자라고 생각하고 챔피언이 되는데 몇 시간이 남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 어디에도 적수가 없으며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나는 이 위대한 정복자들에게 미리 경의를 표한다."
 
라는 희대의 설레발 까지 쳐버린다....
 
 
 
 
 
 


그러나 브라질 - 아르헨티나가 영국과 프랑스 관계라면

 

브라질 - 우루과이는 거의 한일관계 수준이었는데

 

과거 브라질의 식민지로서 탄압을 받은 우루과이였고

 

 

이렇게 설레발을 쳐대는 브라질을 본 우루과이 선수들은

 

머리끝까지 개빡쳤고, 주전 공격수인 알시데스 기지아는

 

설레발 친 신문을 모아놓고 동료선수들과 함께 단체로 소변을 갈기며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소변을 갈긴 후 주장 웁둘리오 바렐라는 이렇게 말한다

 

"저 빌어먹을 브라질 새끼들을 밟아서 으깨버리자고!!!"

 

 
 
 
 

진짜 사진만 봐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당시 마라카낭 경기장
 

그리고 드디어, 결승전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마라카낭 경기장이 완공된다.
 
 
경기 당일에만 공식 17만 3850명
 
비공식으로 25만명의 관중이 브라질의 첫 우승을 보기 위해 마라카낭으로 온다
 
 
현재까지도 이 관중 기록은 월드컵 역사의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전 경기에서 13골을 뽑아낸 브라질은 초장에 경기를 끝장내기 위해
 
미친듯이 우루과이를 몰아붙힌다.
 
 
그러나 잔실수가 많았던 우루과이의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가
 
그날 따라 신들린 슈퍼세이브를 연달아 보여주었고
 
당대 최고의 윙백이었던 안드라데는 브라질의 공격수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었다
 
 
 
 
 
 


그러나 브라질에는 레전드 공격수 아데미르, 자이르, 프리아사
 
그리고 브라질의 레전드 중 한명이자 펠레가 존경한 선수인 지지뉴까지
 
미친듯이 슈팅을 때렸고
 
 
결국 무수한 세이브를 기록했던 마스폴리도 후반 2분, 프리아사에게 선제골을 먹힌다.
 
 
그야말로 전 브라질이 열광했고, 사실상 세계의 모든 팬들이 브라질 우승을 예측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모든 우루과이 팬들과 선수들이 포기할 때 쯤
 
우루과이의 주장인 옵둘리오 바렐라 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씨바 니네 잘들어라!! 우리가 이거에 기죽으면 우리도 스페인이나 스웨덴 처럼
 
될 것이 뻔한상황!
 
 
 
 
 


어차피 경기를 하는 건 제 3자가 아니라 우리다
 
자 이제 우리가 본때를 보여줄 때가 왔다



위 발언은 실제로 바렐라가 경기 중에 한 실제 발언이고
 
이에 고무된 우루과이 선수들은
 
적어도 한골이라도 넣겠다는 심정으로 무시무시할 정도로 압박을 전개한다.
 
 
반면 브라질 선수들은 골을 넣은 직후 힘이 풀린 것도 있었고
 
우루과이가 미친듯이 압박을 가하자 마치 술먹은 얼굴마냥 홀린듯한 표정을 지으며 쩔쩔매기 시작한다
 
 
 
 




브라질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해도 브리질 선수들은 단체로 넋이 나가고 있었고
 
후반 21분 우루과이 역대 최고의 윙포워드인 후안 스키피아노
 
당대 최고의 골키퍼 바르보사를 상대로 기지아의 패스를 받아 동점골을 넣는다.

 
 
스코어는 1 대 1, 다만 비겨도 우승이었기에
 
설령 비긴다해도 25분만 버티면 되었다.
 
모든 브라질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후반 34분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후반 34분 우루과이의 알데이스 기지아는 빠른 드리블로 마크맨을 제친후
 
빈공간으로 공을 몰고 나간다.
 
 
그리고 페널티 라인에서 기습적인 슛을 날리고
 
 
 
 
 



 
 
 
 
 
 
 
 




 
 


공은 바르보사 골키퍼와 골포스트 사이를 정확히 꿰뚫었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우루과이의 역전골이 터진다.
 
 
 
 
 
 
 


당시 영상을 보면 무서울정도로 고요하다
 
그야말로 갑분싸 그자체였고
 
열광하던 브라질 팬들은 일제히 침묵한다.

 
경기장엔 그저 소수의 우루과이 팬들이 외치는 기지아!! 함성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경기가 종료가 되면 브라질 선수들은 산채로 슈하스코(브라질 식 꼬치)가 
 
될 것이 자명한 상황
 
 
브라질 선수들은 초인적인 힘으로 우루과이 골문을 10분간 맹폭했지만
 
마지막 공격기회에서 자이르의 회심의 슈팅이 우루과이 골키퍼 마스폴리에게 막혔고
 
주심은 바로 경기 종료 휘슬을 분다
 
 
 
그리하여 브라질이 그렇게 설레발치고 확신했던 첫 우승의 꿈은 그야말로 개박살이 나버린다
 
 
 
 
 
 


비유를 하자면 일본 월드컵에서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한일전이 펼쳐졌는데
 
한국이 이기고 월드컵 우승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실제로 경기가 끝나자 마라카낭 경기장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에 휩싸인다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브라질 팬들은 집단 패닉에 빠졌고
 
오죽하면 당시 경기장 안에서 파리가 날라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직후 브라질 팬 4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는데
 
2명은 심장마비, 2명은 권총자살이었다.
 
 
 
 
 
 


근데 ㅈㄴ 황당한건 우루과이 쪽도 마찬가지였는데
 
우승직후 기뻐하던 우루과이 선수단은
 
자신들을 죽일듯이 쳐다보는 17만명의 브라질 팬들을 보며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직감
 
성난 팬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우승 시상식도 대충 하고 황급히 우루과이로 도망친다
 
 
 
또 경기전 우승을 기정사실화로 치부한 브라질은 경기전인데도
 
브라질 마음대로 브라질의 우승기념메달, 축사도 브라질이 쓰는 포르투갈어로만 준비했기에
 
우루과이는 축사도 기념메달도 받을 수가 없었고
 
심지어 피파회장인 쥘 리메도 있는 연설 대본이 포르투갈어 버전밖에 없어서 ㅈㄴ 당황했다고....
 
 
 




경기가 끝난 직후 브라질 전역에서 조기가 계양되었고
 
울분을 참지 못한 팬들이 전국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고
 
자살자들이 속출한다.
 
 
그야말로 국치일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브라질 협회는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입은 유니폼은 모조리 수거해서 싸그리 불태워버린 후
 
기존까지 홈팀 컬러인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바꿔버린다
 
 
만약 브라질에서 코로 슈하스코를 먹고 싶다면
 
이 흰 유니폼을 언급해주면 된다
 
 
 
 
 


그리고 이 일은 비단 협회를 넘어 선수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당대의 레전드들도 이 국치일의 책임을 물어
 
지지뉴, 아데미르 같은 전설들은 다신 월드컵에 발도 못붙였고
 
그나마 가장 어렸고 1초도 안 뛴 니우통 산투스 만이 다음 월드컵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대역죄인, 전범 취급을 받은건 골키퍼 바르보사
 
남미 최고의 골키퍼였던 그는 말 그대로 역적이 되었고
 
 
은퇴 후에도 사람들은 그를 욕했고, 길거리에서 그가 누구냐고 물어본 아이에게
 
아이 엄마가 "브라질 국민을 절망과 좌절감에 빠뜨린 역적이란다" 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심지어 꽤 많이 시간이 흐른 뒤 브라질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에 지원했는데도
 
패배의 징크스를 가진 사람을 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또한 경기 후 43년이 지난 1993년에도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축구 중계도 협회가 막았고
 
흑인이었기에 인종차별적 모욕과 더불어 흑인에게 골키퍼는 절대로 시키지 않는다는 인종차별이 자행된다
 
 
그나마 이건 2006년 디다 골키퍼의 월드컵 선발 출장으로 깨지긴 했으나
 
무려 56년이나 이 인종차별적 행위가 이뤄진 것이다.
 
 
 
 
 
 


바르보사도 오죽 한이 맺혔으면 유언으로
 
 '브라질에서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도 43년 이상 형을 선고받지 않는데 
 
나는 그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50년을 죄인처럼 지내야만 했다'
 
 
라고 삶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말한 정도였으니....
 
 
다만 바르보사 외에도 당시 경기에 출장했던 선수들에게는
 
마라카낭의 치욕일만 되면 브라질 전역에서 전화가 와서
 
"그때 시발 왜졌냐?" 라는 전화가 하루 종일와서 선수들은
 
그날만 되면 전화선을 뽑아놨다고 한다. 무려 50년간
 
 
 
 
 
 


이런 집착은 브라질 선수를 넘어 당시 1골 1어시를 기록한 우루과이의 알시데스 기지아에게도 이어지는데
 
경기 종료 후 50년 뒤, 브라질을 방문한 기지아을 
 
20대 정도의 여성 세관원이 알아봤고, 기지아가 놀라서 물어보자
 
 
"브라질의 우리들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오늘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낀다."
 
라는 답변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고 한다.
 
 
이정도면 거의 집착을 넘어 원한 그자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가운데 할아버지가 바로 기지아 옹
 

마라카낭의 비극이 끝난지 63년이 지난 2013년
 
당시 생존해 있던 기지아는 브라질 축협에게서
 
2014 브라질 월드컵의 조추첨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브라질은 당시 패배를 안겨준 원흉을 초대해 액땜 겸 우승을 해낸다는 각오로 그를 불렀는데
 
기지아가 조추첨을 한 그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어............음...........
 
 
마라카낭에 버금가는 비극을.... 여기까지 말하겠다
 
 
 
 
아무튼 참패를 당하고 브라질 전역에 어둠이 드리워졌지만
 
과거 카르타고의 하밀카르가 아들인 한니발에게 로마에 대한 복수를 맹세시켰듯이
 
 
 
 
한 보잘것 없는 흑인 아마추어 선수는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리오의 예수상 앞에서 브라질 축구를 부흥시키겠다고 맹세를 시키고
 
 
 
 
 
 
 


예수상 앞에서 맹세한 그 흑인 소년은
 
8년 뒤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첫 우승을 안겨주는 축구의 황제
 
펠레이다.
 
 
 
참고로 이 당시 마라카낭의 비극의 엔트리에 들었던 니우통 산투스도
 
젊은 펠레와 함께 1958년 월드컵에 나갔고
 
거기서 그는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세 명만이 마라카낭을 침묵시킬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 프랭크 시나트라, 그리고 저입니다."
 
-알시데스 기지아-
 

부동산 담보 대출 이란??

자신이 보유한 주택, 오피스텔, 토지, 상가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이다. 법인의 경우에는 회사 사옥이나 공장, 토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기도 한다. 담보가 확실하므로 이자가 낮고 대출한도가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서류 처리가 복잡하다. 자신이 매입하려는 부동산을 담보로 빌리는 것도 가능하며 이를 영어로는 모기지(Mortgage)라 한다. 매매 금액이 감정평가액에 미달되는 경우에는 매매계약서를 첨부하기 때문에 감정평가액의 70%가 아니라 매매금액의 70%로 대출이 실행되는 경우도 있다.
가장 흔한 부동산 담보 대출인 주택담보대출은 보통 30년 만기로 받으며 정부 규제에 따라 LTV, DTI, DSR이라는 세 가지 규제가 적용되에 최대 대출 가능 금액에 상한이 있다. 규제가 수시로 바뀌므로 반드시 은행원과 상담하여 정확히 알아볼 것을 권한다. 본 문단에서는 규제의 기본 골격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LTV(Loan to Value ratio - 담보인정비율): 담보 대상 물건 가액의 일정 비율까지만 대출이 가능하도록 설정한 규제. 보통 대출을 신청하는 날짜 기준의 KB시세를 많이 사용하며, 지역에 따라, 담보 대상 물건의 시가에 따라, 대출을 받는 사람과 배우자의 합산 소득 등에 따라 LTV 비율이 다르게 적용된다. 예를들어 KB 시세가 8억이고 LTV 60%를 적용받고 아래에서 설명할 DTI DSR규제에 걸리지 않는다면, 최대한으로 대출 받을 수 있는 금액은 4억 8천만원까지다. 다만 아파트 1층의 경우에는 일반평균가가 아닌 하위평균가를 적용하는 은행이 있어서 주의를 요한다. 보통 1층이 다른 층에 비해 비선호되고 거래도 낮은 가격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DTI(Debt to Income Ratio, 총부채상환비율) - 주택담보대출을 받음으로 인하여 계산되는 연원리금 상환액과 다른 대출의 이자의 합이 자신의 연 소득에서 일정비율 이상 초과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 해당 주택담보대출의 연간 원리금 상환비율을 연간 소득으로 나눈 비율을 기준으로 삼는다. 역시 지역과 실수요자 요건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최근에는 상위호환인 DSR규제가 우선적으로 적용됨에 따라 실효성이 많이 낮아졌다.

 

DSR(Debt Service Ratio -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 본건 주택담보대출외에 기존의 다른 대출이 있다면 그 다른 대출[9]의 연간 원리금 상환액과 새로이 받을 주택담보대출의 원리금 상환액을 합쳐서 일정 비율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 나이브 하게 얘기해서 자신의 연소득이 2,400만원이고 DSR이 50%인 경우, 다른 대출이 없다면 매월 나가는 원리금이 100만원을 초과해서는 안되고 다른 대출로 매월 60만원이 나간다면 새로이 나갈 부동산담보대출은 매월 나가는 원리금을 40만원 미만으로 해서 한도가 설정되며 그 이상으로는 전산상으로 승인이 되지 않는다. 지점장 재량도 먹히질 않는다.

 

기존에는 개별은행 전체를 기준으로 DSR을 적용해 각 개인에게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으나, 각 차주 기준으로 DSR을 적용하도록 규제가 적용되고 그 대상이 확대됨에 따라 전반적으로 주택담보대출 한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2021년 대출 규제가 무주택자가 집을 사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이유.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정책적으로 부동산에 의한 경기부양정책을 내세우면서 발생한 임기초 부동산경기 호황, 문재인 정부에서의 연이은 정책 실패로 인한 부동산 폭등과 추격 매수심리에 힘입어 주택담보대출 잔고가 상당히 증가했다. 하지만 미국 금리 인상과 부동산 가격 거품에 따른 채무의 부실화가 문제되고 있기도 하다. 다른 부동산담보대출의 경우 원금은 상환하지 않은 채 매월 이자만 납부하는 방식으로 대출을 실행할 수 있는데 주택담보대출은 원금과 이자를 같이 갚아야 하는 구조라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몇가지 규제가 추가로 있는데 주요한 것만 보자면 아래와 같다. 역시 디테일한 부분이 수시로 바뀌므로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아래에서 일정기간이라고만 적은 것도 규제가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KB 시세 기준으로 15억을 초과하는 주택은 LTV가 0%다. 즉, 주담대가 한 푼도 나오지 않는다.

주택을 두 채 이상 보유한 사람이 신규 주택을 매수할 목적으로하는 대출도 LTV가 0%다.

주택담보대출을 실행하고 일정 기간 내에 주민등록상 전입을 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대출이 즉시 회수되고 주택관련 대출을 받을 수 없는 등의 패널티가 있다.

일시적 2주택의 경우 일정 기간 내에 기존 주택을 처분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이 주택담보대출 채권을 다단계로 주물러서 파생상품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를 부른 주범 중 하나인 MB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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