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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예상보다도 탈레반 에게 빨리 함락된 이유 분석 긴글

by 냄비천사 2021.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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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의 몰락 뒤편 - 아프가니스탄의 군대는 실패하도록 설계되었다>

아프가니스탄 군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음에도 이를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제도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남서부 전역에 펼쳐진 거대하고 죽음의 사막인 Dasht-e-Margo 속으로 트럭들이 전부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역 상인들은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곧 알아챘다. 2015년 나토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 작전을 종료하고 책임을 아프가니스탄군에 이양했다. 탈레반은 몇 주 만에 다시 등장해 인도가 건설한 이란에서 자란지를 넘어 헬만드 강을 거쳐 카불까지 이어지는 606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는 물품의 수익 일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2017년, 님로즈 주에서 606번 국도를 통해 아프간에서 가장 번영하고 개화된 도시로 변모한 자란지의 무역상들은 주지사 무함마드 사미울라에게 자신들의 트럭이 납치당하는걸 막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청원했다.

 

그해 말, 발루흐족 무역상이 자란지 세관에서 정부 요원 옆에 앉아 탈레반에게 관세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해, 탈레반은 상인이 사기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를 투옥시킨 후 160만 달러를 찾아냈다. 그러고서 탈레반은 고르고리의 고속도로를 따라 자신들만의 세관을 세웠다.

 

8월 6일에 자란지는 주도들 가운데 처음으로 탈레반에게 함락당했다. 이슬람 그룹의 군대가 동쪽과 북쪽을 휩쓴 끝에 결국 주 전체를 장악했다. 주도 자란지에서는 저항은 거의 없었다. 라쉬카르 가에 본부를 둔 215군단의 대대 규모 파견부대 및 지역 경찰들은 지역내 상공인들과 중재한 끝에 철수했다. 인근지역인 캉에서 저항을 선택한 아프간군은 전멸당했다. 패잔병들은 고문을 당하고 눈이 뽑혔다.

 

탈레반의 대승 이후, 관측통에선 18만의 아프간 정부군과 소규모 공군을 포함한 30만에 달하는 아프간의 보안 병력이 어떻게 그리 쉽게 무너졌는지 의문을 품었다. 8월 6일 주도들 가운데 처음으로 함락당한 자란지의 배경은 그 배경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프간군은 세가지 문제-병력 자원, 병참, 파키스탄을 통해 국경을 드나드는 국경선 통제 문제-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아프간 군이 단지 그냥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몇몇 사례들은 아프간 군이 어떻게 실패할 수 밖에 설계되었는지 보여준다.

1. 병참 안정화

 

병참 분야는 멋져 보이지 않는다. 이건 책상 위에 웅크리고 앉아 연료, 식량, 탄약을 최전선으로 옮기는 데 몇 대의 트럭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들을 그곳에 가져오는 방법을 계획하는 보급관에 대한 영화를 아무도 만든 적이 없는걸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부한 사실은 이러한 작업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어떤 용맹하고 대담한 지휘관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Robert Citino와 같은 학자들은 나치 독일이 소련에게 패배한 이유로 병참 구조의 붕괴를 꼽은바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전문가들은 아프간 군의 병참 상황에 대해 경고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프간군이 주도하는 군사 작전으로 전환한 지 첫 해인 2015년, 아프간 군대는 수천 개의 초소와 전초 기지에 분산 배치됐다. 아프간 경찰 역시 14만 7000명에 달하는 병력 중 절반 이상을 이 초소 경비에 투입한걸로 추정된다. 약 53,000명의 병력(또는 그 3분의 1에 지나지도 않을 수준)의 군병력이 흩어져 배치된 10명에서 15명 사이의 이런 소규모 초소들은 탈레반에게 쉽게 포위되어 제압당했다.

 

2017~2018년에 걸쳐 이런 전초 기지의 숫자는 감소했지만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전초 기지 및 초소들을 철수 시키는 것은 시골 지역의 넓은 지역이 탈레반에게 양도되었음을 의미했고, 요충지를 연결하는 도로는 반군들의 손에 넘어갔다.

 

연료는 핵심 문제였다. 올 7월에 발행된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간 재건을 위한 미국 특별 감찰관은 "연료 보급에서 사기, 낭비, 남용이 미국과 아프간 정부에게 극도로 취약한 상황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한 지휘관은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할당된 연료의 거의 절반이 도난당했다며 "연료가 없으면 아프간 군을 운영할 수 없다" 한탄했다.

 

감찰실에서 2018년부터 이 문제를 아프간군에 연료를 공급하는 미군 지휘관에게 지적하고 해결하도록 압박했으나 그들은 순조로운 임무 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021년 4월부터 아프간 군의 연료 공급망은 간단히 해체됐다.

 

이러한 문제가 다른 여러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수년 동안 미국이 아프간군에 공급한 차량은 유지 보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간단한 고장에도 수리하는 대신 폐차되었다. 정비 기술자들을 양성하려는 교육은 2017년에 시작되었지만 그 수는 여전히 부족했다. 게다가 정비 도구와 예비 부품을 확보하는데도 만성적인 문제가 나타났다.

 

탈레반의 대대적인 공격이 벌어진 봄, 고장난 차량을 수리하지 못해 많은 차량들이 가동되지 못했다. 특히 격오지에서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다가왔다. 

 

이러한 약점 중 일부를 보완하는 데 중요한 아프간 공군은 이미 여름에 붕괴된 상태였다. 지상군에게 필요한 근접항공 지원을 A-29 슈퍼 투카노와 같은 항공기에 의존했지만, A-29를 위한 아프간 정비 요원은 2015년 12월에서야 양성되기 시작했다. 2016년 말에도 아프간 공군은 여전히 조종사와 자체적인 정비요원이 필요 숫자보다 부족했다. 아마 정비 보수 분야를 맡은 민간 용역업체 계약과 지원은 최소한 2023년까지 이들에게 필요했었을 것이다.

2. 탈레반 출입국 통제

 

처음부터 아프간 군대의 계획에는 파키스탄과의 국경을 지키는 능력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은 아프간 군대가 국경 너머에서 훈련받고 양성되는 탈레반 병력이 보충되는 것을 저지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프간 군은 또한 탈레반의 보급 라인을 공격목표로 삼을 능력이 거의 없었다. 이는 잠무와 카슈미르에서 인도군이 대처한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인도군은 이들 분쟁지역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35만 2000명의 병력 중 30만명 이상을 동원해 통제선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미국의 전략 기획자들도 이 문제를 이해했다. 2011년 당시 미국 합참의장이었던 마이크 뮬렌은 탈레반이 “파키스탄에서 어떤 방해없이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한 “파키스탄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극단주의 단체들이 미군은 물론 아프가니스탄 군대와 민간인을 공격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이슬라마바드는 중국에게는 물론 서아시아에서 국가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였으나, 아프가니스탄은 그렇지 않았기에.

 

이 같은 문제에 대한 소련의 경험은 이런 군사적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82년 전 KGB 장교인 Vladimir Kuzitchkin은 소련군이 감시 초소들과 철조망, 지뢰밭을 건설하여 파키스탄과의 국경을 봉쇄한 다음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아프가니스탄에 갇힌 빨치산들을 섬멸할 계획"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약 30만명의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되어야 했으며, 이는 지도부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대신에 소련군은 공군력을 이용해 무자헤딘 수송대와 군수품을 공격했다. 그들은 국경을 따라 50km의 출입금지 구역 내 위치한 농업 기반 시설과 마을을 융단 폭격했다. 1985년 8월, 소련군이 파라치나르의 무자헤딘 기반 시설을 공격했고, 이듬해 다시 자와르를 공격했다.

 

공습은 무자헤딘의 전투 능력을 현저히 위축시켰지만 일시적이었다. 충분한 병력 없이 소련은 그들이 쓸어버린 구역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1986년 11월 소련 정치국 회의에서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이란과의 국경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했지만. 경험에 의하면 이 지역의 험난한 지형과 산에 수백 개의 고개가 있어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

 

학자 Thomas Bruscino는 "소련은 국경을 폐쇄할 수 없거나 시도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소비하지 못한다면 그 전쟁은 누가 가장 오래 싸울 수 있는지 의지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걸 인정함과 동시에 소련군의 철수 결정이 내려졌다.”고 덧붙였다.

3. 리더십과 제도

 

9.11 테러 이후 수년 동안 아프간이 군사력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탈레반이 파키스탄으로 철수했을 때만해도 이들의 위협이 최소화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후 계획을 수립한 사람들은 외국 군대가 거의 무기한 유지 될 것이라고 믿었다. 9.11 이후 아프간 국방부를 이끌었던 무자헤딘 베테랑인 파힘 칸(Fahim Khan)은 35만명의 아프간 군대 양성을 주장했지만 무시당했다. 공식 보고서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파키스탄이 아니라 내부 파벌싸움이라고 믿었다”고 지적했다.

 

여러 경험에 근거한 법칙에 따르면, 반군에게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선 인구 50명 당 군인이나 경찰 한 명이 필요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그것은 약 50만명에 달하는 인원을 의미했다. 대신 국제 기부자들은 7만의 "강력한" 군대와 6만 2000명 수준의 "강력한" 경찰력을 유지하는 자금을 제공했다.

 

탈레반 반군이 다시 등장한 2006년 무렵 아프간 내 경찰과 군대는 겨우 6만명에 불과했다. 미국은 아프간 군대의 수를 늘리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교육을 거의 혹은 전혀 받지 못한 인력들을 모집하고 및 배치했지만 리더십은 부재했다. 특히 아프간 군대의 절반 미만은 글을 읽을 줄도 몰랐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정부는 증가하는 반군을 억제하기 위해 군대를 증파했지만 2년 만에 철수를 시작했다. “증원된 미군으로 인해 주요 지역에서 탈레반의 활동이 둔화됐었다"라고 말한 학자 알리 자랄리는 “대반군 작전이 성공하려면 인내와 시간이 필요했음에도. 급파된 병력은 배치하는데만 약 6개월이 걸렸고, 2011년 7월에는 철수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아프간 군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지만, 안정적으로 제도적 문화를 발전시키고 독립적으로 운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미 육군 장교 데이비드 박(David Park) 소령은 "좋든 싫든, 아프간 국군 교리는 미국 교리를 모방했다"고 적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육군 장교들이 미군 교리가 작전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배웠다며 아프간 군대가 "전투 시 근접 항공 지원(CAS)에 의존하도록 조련되었다"고 밝혔지만 정작 아프간 공군은 그러기 위해 필요한 자원이 없는 실정이었다.

 

2014년 미국과 영국군은 아프간 215군단에 책임을 맡기고 헬만드에서 철수했다. 불과 몇 달 안에 새로운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탈레반은 2016년까지 헬만드 주의 14개 구역 중 12개 구역을 점령한 후 주도 라쉬카르 가를 포위했다. 탈레반이 전진하면서 아프간 군은 더 많은 영토 방어를 포기하면서 소위 "전술적 후퇴"를 연속적으로 반복했다.

 

학자 앤드류 퀼티는 “카불에서 일주일에 두 번 출발하는 민간 항공편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며 “대신 돌아오는 비행기는 꽉 차 있었다”고 기록했다.

 

2017년, 강력한 공군력을 등에 업은 소수의 미군이 투입돼 헬만드 전선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국의 농촌 지역에서 탈레반은 계속 확장되었다. 아프간 군대는 서서히 반군의 바다로 포위당해 있었고, 보급선이 막혀 영토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번 달에 카불이 함락되기 오래 전부터, 아프간 군 기구들은 실체적 목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력화 당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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