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상처받았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 파리 해방 이후 '샤를 드골'의 연설 中 1944년 파리는 나치 독일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자유를 만끽했고 전세계에 파리 해방을 대서특필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으며 이는 곧 나치독일을 위시로 한 추축국들의 몰락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밝은 면이 있다면 반대로 어두운 면도 존재하는 법 파리 해방의 이면엔 상상 그 이상의 음습함과, 불쾌함과, 섣불리 들추기 힘든 진실이 있었다
해방자를 자처한 리베라시옹들은 제일 먼저 나치 부역자 명단을 작성했다
이 명단은 무려 1944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꾸준하고 방대하게 작성되었는데
명단에 오른 이들의 죄의 유무는 확실치 못했다
무분별하게 작성된 이 명단엔 남성, 여성부터 교수, 의사, 판사, 변호사, 기업가, 성직자 등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이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명단에 올라간 '나치 부역자' , 즉 콜라보라시옹들은 밀고, 모함, 고문, 협박 등을 통한
자백을 근거로 유,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지극히 짤막하고 형식적인 재판을 거친 후 처분을 받았는데
그들은 처분을 받기전 '나는 나치 부역자입니다'
혹은 '나는 나치와 잤습니다' 라는 등의 팻말을 목에 걸고
성난 대중의 돌팔매질과 모욕, 조리돌림을 버젓이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보복조치는 해방자이자 지도자인 샤를 드골의
나치 부역자에 대한 강경한 태도와 맞물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 환한 표정의 '리베라시옹' 과 어두운 표정의 '콜라보라시옹' 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
그들의 죄목은 중하거나 때로는 단순하기도 했는데
독일군 병사를 숨겨주었거나, 눈이 맞아 잠시 사귀었거나, 또는 간단한 심부름을 했거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독일군을 도와주었거나, 독일군과 식사를 같이 했거나
혹은 독일군과 몇마디 말을 나누었다고 밀고자로 고발당하는 등, 그 사례는 매우 다양했다
나치 부역자 중 남성은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즉시 총살형에 처했으며
여성은 머리가 밀리고 이마에 나치의 만자무늬를 새겨넣은 다음
알몸으로 거리에 내몰려 공개적인 성적 수치심을 받았다
개중에 운이 좋다면 속옷이나마 걸칠 수 있었지만 그녀들에겐 더 큰 시련이 기다렸으니
바로 보복성 강간이었다
문제는 독일군에 의한 강간으로 사생아를 낳았음에도
또 다시 프랑스 국민에 의해 강간을 당한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 머리를 박박 깎은 여성들. 품에 안긴 아이는 어느 독일군의 사생아로 추정된다 )
여성들은 이마에 나치의 만자무늬를 새겨야했는데 어떤 이는 단순한 펜으로
또 어떤 이는 칼로 그 무늬를 새겨야 했다
그렇게 자국민에 의해 유린당한 여성들 중엔 죄의 경중에 따라 총살을 당하거나
운이 좋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나치 부역자라는 꼬리표가 달려 철저하게 외면받고 버려졌다
또한 그녀들은 연합군이 지원해준 식량을 제대로 배급받을 수도 없었기에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을 겪었다
샤를 드골의 묵인, 주도 하에 이루어진 다소 거칠고 모진 방식의 보복조치는
195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금지되었으며
무고한 이들을 포함한 피해자는 1만명이 넘었는데 이것은 공식적으로 집계한 수치였고
미확인된 시체들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이루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또한 분노한 대중들에 의해 금지령이 내린 뒤에도 산발적으로 비공식 처분이 발생하기도 했다
" 나치 부역자이던 남편은 살해되었고 이어 그 부인이 강간당한 뒤 11살의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
" 묶인 남성은 자신의 딸이 12번이나 범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
"부역 혐의자의 눈이 찔리고 생식기는 잘려나갔으며 불타는 침대위에 강제로 눕혀졌다. "
" 여성들은 가슴이 도려내졌다. "
. . .
" 나치 부역자들은 맨발로 깨진 유리 위를 걸어야 했고, 여성은 체포자에게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나체가 되었으며 마치 동물처럼 교미해야만 했다. "
" 어느 성직자는 자신의 무덤을 직접 파야 했고 그는 생식기에 총을 맞고 생매장되었다. "
- 당시 상황을 묘사한 목격자들의 증언
위와 같이 나치 부역자에 대한 매서운 보복의 열기가 종전 이후에도 식을 줄 모르자
샤를 드골은 반(反) 나치 레지스탕스 세력을 점차 멀리하고
비시 프랑스의 국가원수, 즉 나치 부역자의 수장이었던 필리프 페탱을 변호하며 국가안정을 꾀했으나
결국 지지를 잃고 1946년 정치계를 떠나게 된다
그 이후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에 강력한 탄압 정책을 펼쳤는데
인도차이나 알제리 콩고 등의, 과거 해외 식민지였던 국가들에 파병을 하다 프랑스에 대한 국제여론이 악화되었고
과거의 승전국에서 전범국으로 지위가 떨어졌으며잦은 전쟁개입으로 국고가 거덜나자 이내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결국 결론은 그러했다
그들은 도덕적 책임감과 뉘우침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어쩔 수 없었기에 그만둔 것이다
추가로, 프랑스 대중의 나치 부역자에 대한 보복인식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는데
특히 과거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거나 주도했던 세력은 지속적으로 반(反) 나치를 표방하며
1980년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 결과 나치 부역자를 비판했던 미테랑이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게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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