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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나눔

왕위 계승 제도 후계자 제거 120년간 존속된 오스만 제국의 형제살해 관습

by 에꼬로크 2022. 11. 21.

1.

몽골-튀르크 계통의 유목민족들은 뛰어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나타날 경우 종종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곤 했으나, 그 지도자가 죽고 나면 후계자 문제로 분열과 내전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쇠퇴하는 경우가 잦았음. 그에 반해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부족들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오스만 제국은 13세기 말에 창건된 이래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장장 600년 가까이 큰 분열없이 유지될 수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는 술탄의 형제들을 제거하여 후계자 분쟁의 위험을 최소하하는 잔혹한 관습이 큰 기여를 했음.

 

물론 오스만 황실에 처음부터 형제살해 관습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에 따라 초기에는 내전이 빈번히 일어났음. 예컨데 오스만의 실질적인 첫번째 술탄 무라트 1세의 경우에는 형제인 할릴과 싸워 이긴 후에야 술탄으로 즉위했으며, 아들 사브즈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후 그를 실명시키기도 했음. 무라드 1세의 아들인 바예지트 1세의 경우에는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그 사실을 감추고 자신의 동생 야쿠브를 진중으로 불러 살해한 후 술탄으로 즉위하기도 했음. 또한 바예지트 1세가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힌 후 오스만은 한동안 공위 상태에 빠져들었는데, 이때 바예지트의 네 아들들이 10년에 걸친 내전을 벌이며 서로를 죽고 죽인 끝에 메흐메트 1세가 술탄의 자리를 차지했음. 후에 등장한 무라트 2세의 경우에는 동생 무스타파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제거하고 어린 동생들마저 실명시키기도 했음.

 

(※ 오스만 황실에서는 이후 왕위 계승 분쟁을 막기 위해 이런저런 관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예컨데 술탄의 여자들은 대부분 외척의 힘을 빌릴 수 없는 노예 출신이어야 했고, 또한 편애를 막기 위해 한 여인에게서 오로지 한 사람의 아들 만을 얻어야 했으며, 왕자가 아들을 낳게 되면 술탄은 더 이상 아들을 낳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이었음. 앞서 이야기한 것 처럼 내전의 위험을 내포한 이들은 처형당하는 대신 실명을 당하기도 했으며, 후술할 형제살해의 관습도 이런 후계자 분쟁과 내전을 방지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었음.)

 

1451년, "정복제" 메흐메트 2세가 두 번째로 즉위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음.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인 무라트 2세가 스스로 퇴위함에 따라 어린 나이에 술탄이 되었으나, 무라트 2세가 돌아와 다시 술탄이 되자 자리에서 밀려나는 일을 겪은 바 있었음. 그런 그가 성년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정식으로 재위를 물려받게 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어린 이복동생인 아흐메트를 살해한 것이었음. 메흐메트 2세는 이후 잘 알려져 있듯이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시작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음. 그는 말년에 《법령집》을 편찬했는데 이때 아예 "(술탄은)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 형제를 처형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넣어 형제살해 그 자체를 명문화시키기에 이르렀음. 

 

 

 

2.

1481년, 메흐메트 2세가 원정을 준비하던 중 급사하자 그의 아들인 바예지트 2세가 수도 이스탄불로 달려가 예니체리 군단의 지지를 받아 술탄으로 즉위했음. 그에게는 야심만만했던 동생 젬이 있었는데, 그는 형에게 아나톨리아를, 자신은 발칸 지역을 분할 지배할 것을 요구했음. 바예지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젬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이후 젬은 달아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요한 기사단의 로도스 섬을 거쳐 교황에게까지 망명했고 최후에는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스의 샤를 8세를 따라가는 등 파란만장한 롤러코스터 인생을 살다가 나폴리에서 사망했음. 이후 바예지트 2세는 큰 대외원정을 자제하고 내정과 문화진흥에 주력했음.

 

1512년, "냉혹제" 셀림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늙은 아버지 바예지트 2세를 폐위시키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음. 셀림 1세는 자신의 두 형이었던 아흐메트와 코르쿠트를 죽였고 심지어 그 아들들까지 모두 처형하여 재위 다툼을 방지했음. 이후 셀림 1세는 그 조부인 메흐메트 2세를 능가할만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오랜 숙적인 사파비 왕조를 격파하고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켜 이집트를 정복하는 등 오스만 제국의 판도를 크게 넓혔으나 흑사병으로 사망하고 말았음. 

 

1520년, 셀림 1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장엄제" 쉴레이만 1세가 즉위했는데, 이에 대하여 서양 측의 기록에서는 셀림 1세가 후계자 분쟁을 막기 위해 쉴레이만을 제외한 모든 아들들을 죽였다고 전하고 있음. (※ 오스만 측의 기록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없어서 진위여부는 의심스러움.) 그는 이후 46년 간이나 재위에 있으면서 이른바 오스만 제국의 황금시대를 열었으나, 가정사는 불행했음. 장남 무스타파는 지나치게 인기가 많았던 탓에 아버지에게 밉보여 자신의 아들들 및 측근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말았고, 다른 아들들은 병으로 요절했으며 바예지트는 반란을 꾀했다가 진압당하고 외국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마지막 남은 아들인 셀림 2세가 후계자가 되었음. 

 

1566년, 쉴레이만 1세가 헝가리 원정 중 사망하자 셀림 2세가 뒤를 이어 즉위했는데 그는 이미 왕자 시절에 형제들이 알아서 차례로 죽어 줬기 때문에 형제를 죽일 필요가 없었음. 그리고 1574년, 셀림 2세가 급사하자 그의 장남인 무라트 3세가 뒤를 이었음. 그는 셀림 2세의 오른팔이었던 대재상 소콜루의 지지를 받아 술탄이 되었는데 즉위 직후에 어린 동생 5명을 모두 처형했음. 

 

진정한 비극은 1595년, 무라트 3세가 죽고 그 장남인 28세의 청년 메흐메트 3세가 즉위하면서 터지고 말았음. 그는 마니사의 총독으로 부임하던 중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곧장 수도 이스탄불로 달려가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했는데, 문제는 그의 아래로 무려 19명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이 있다는 것이었음. 그들은 너무 어려서 형제살해의 관습조차 알지 못한 채 왕위에 오른 형을 해맑은 모습으로 축하했는데, 메흐메트 3세는 이때 슬픔으로 억장이 무너져서 고개를 돌린채 인사를 받는 등 동생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함. 결국 즉위 직후 관습에 따라 19명의 어린 왕자들이 모두 처형당한 후 그들의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그 참혹한 모습에 이스탄불 사람들이 모두 비탄에 잠길 정도였다고 함. 

 

 

 

3.

19명의 동생들을 죽이고 옥좌에 오른 메흐메트 3세의 삶도 행복하진 못해서 이스탄불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자 그 배후에 장남 마흐무트가 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처형시켜 버렸으며 그 자신도 같은 해인 1603년에 요절하고 말았음. 메흐메트 3세에게는 두 아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형이었던 아흐메트 1세가 뒤를 이어 즉위했음.

 

이 아흐메트 1세의 즉위를 기점으로 오스만 황실에서 형제살해의 관습은 사라지게 되었음. 메흐메트 2세가 말년에 형제살해를 법령으로 명문화한지 1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였음.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는데, 당시 아흐메트 1세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후계자가 없었기에 고위 관료들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아흐메트의 동생 무스타파를 살려두기로 결정한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음. 심지어 무스타파는 이후 아흐메트가 아들을 2명이나 본 후에도 생존했음.

 

그러나 자세한 사정을 파고 들면 근본적인 원인은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조차 형제살해의 관습을 너무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었음. 앞서 언급했듯이 메흐메트 3세가 19명의 어린 동생들을 일거에 모두 죽였던 사건이 이스탄불을 비롯한 오스만 제국 신민들에게 가져다 준 충격이 너무 컸기에 여론이 매우 나빠진 탓도 있었고,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자유민 무슬림을 재판없이 살해하는 것은 중대한 불법행위였기 때문이기도 했음.

 

결국 형제살해의 관습 대신에 자리잡은 것이 이른바 "새장제도"였는데 이는 곧 술탄의 형제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궁전의 한 구석에 격리시키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살게 하는 것이었음. 말 그대로 새장에 갇힌 새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술탄의 재량에 따라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지기도 했고 심지어는 자신이 격리된 지역 내에서 후계자 교육을 받거나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수도 있었지만 남자 왕족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들을 낳는 것은 금지되었음. 이 새장제도는 19세기에 술탄으로 즉위하여 근대화 개혁을 추진한 압뒬아지즈에 의해 폐지될때까지 존속되었음.

 

이렇게 왕위 계승 제도가 바뀐 후에는 술탄이 사망할 시 격리된 왕자들 가운데 연장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그에 따라 이스탄불 정계에 다양한 정파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음. 실제로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술탄이 폐위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기에 격리생활을 하던 왕자가 갑자기 술탄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또 한편으론 술탄들도 이를 경계하여 자신의 대체제를 없애버리기 위해 격리된 왕자들을 사형시키려는 사건도 종종 발생했음.

 

(※ 한편 이렇게 관습이 바뀐 덕분에 살아남은 무스타파는 형인 아흐메트가 죽은 후 술탄 무스타파 1세로 즉위하지만 성품이 유약한 탓에 스스로 퇴위해버리고 어린 조카인 오스만 2세가 즉위함. 그러나 오스만 2세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생 메흐메트를 처형했으며 이후 군제개혁을 시도하려다가 예니체리 군단의 봉기로 폐위되고 시해당함. 직후에 무스타파 1세가 다시 1년간 집권했으나 또다시 폐위당해 15년간 야인으로 여생을 보냈고, 오스만 2세의 또다른 아우인 무라트 4세가 즉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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