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보나눔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한국 타자들: 그들의 업적과 이야기

by 누루하치 2023. 2. 18.

일본 프로야구 (NPB) 에서 활약한 한국인 - 타자 편입니다

 

일본 최초 200승 투수, 이팔룡 (후지모토 히데오)

일본 역대 최다 3085안타, 장훈 (하리모토 이사오)

일본 역대 최다 400승 , 김경홍 (카네다 마사이치)

등등, 교포거나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한국계 선수를 제외한 한국인 선수만 썼습니다. 

하재훈 2016 / 야쿠르트 스왈로즈

 

통산 17경기 9안타 2타점

.225 .262 .275 OPS.537 wRC+ 43

 

2016년, 시카고 컵스 산하 마이너에서 뛰다 일본 독립리그에 입단해서 활약하던 중

5월에 야쿠르트와 약 8만달러 규모에 용병 계약을 맺고 입단했다.

 

등번호 00번, 등록명은 「재훈ジェフン」

 

6월에 곧바로 1군에 등록되어 8경기를 뛰고 2군행

7월에 다시 1군에 올라왔으나 9경기 대타로 뛰고 다시 2군행.

 

그 이후로는 다시 올라오지 못했으며, 야쿠르트는 재계약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이후 다시 일본 독립리그에서 뛰다가 2018년 9월에 시행된 KBO드래프트에서

2차 2라운드(전체16번) SK 와이번스에 지명되었고, 투수로 전향하여 2019 세이브 왕에 올랐었지만

지금은 다시 또 타자로 돌아갔다고 한다.


송상훈 2012 ~ 2014 /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출장 기록 없음
 
덕수중학교 졸업후, 후쿠이 공대 부속 고교에 입학해 2년간 에이스&4번타자로 활약.
이후 3학년에 신일고등학교로 편입해 졸업했다.
 
한일 양국의 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양국 프로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었고
2011년 8월에 시행된 KBO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 8라운드(전체75번) 지명을 받았으나 계약을 하지 않았으며
이후 10월에 시행된 NPB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곤즈 6라운드(전체65번)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투수로 입단했지만 어깨 부상으로 1년만에 야수로 전환했고
야수로는 큰 두각을 보이지 못해 육성 선수(신고 선수)로 전환, 이후 방출되었으며
2016년 8월, KBO 해외파 트라이아웃에 주니치 헬멧을 쓰고 참가한 바 있다.
 
이대호 2012 ~ 2015 / 오릭스 버팔로즈 - 소프트뱅크 호크스
통산 570경기 98홈런 348타점
.293 .370 .486 OPS.857 wRC+ 151
 
「조선의 4번 타자」
 
2011년 시즌 이후 FA자격으로 오릭스와 2년 7억엔(당시 약105억 원) 규모에 계약했다.
이적 첫 해부터 리그 전 경기 출장, 리그 OPS, wRC+ 1위를 달성하며 꼴찌팀에서 타점왕과 베스트 나인 수상.
그러나 2년차에도 오릭스는 이대호와 난쟁이들 상태 그대로였고, 이후 3년 19억엔에 소프트뱅크로 이적한다.
 
소프트뱅크에서도 물론 리그 탑급 성적을 유지하며 14,15년 연속 재팬시리즈 우승에 크게 일조.
2015년은 19년만의 재팬시리즈 외국인 선수 MVP까지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팀 동료들이나 신인급 선수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베테랑 용병이었다.
 
성공적인 용병 타자 영입의 대표적인 케이스.
 
김태균 2010 ~ 2011 / 치바 롯데 마린즈

통산 172경기 22홈런 106타점

.265 .353 .412 OPS.765 wRC+ 112

 

2009시즌 이후 FA자격으로 롯데와 3년 계약을 맺었다. 추정 규모는 약 7억엔(당시 약90억 원)

 

이적 첫 해, 21홈런 92타점을 올리며 올스타에도 선정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고

「역사상 최고의 하극상」이라는 이름이 붙은 2005 재팬 시리즈 우승에 일조했다.

다만 홈런에 비해 장타율은 생각보다 부족했고(.429) 수비 포지션과 연봉을 생각하면 조금은 아쉽다는 평도 있다.

 

2년차, 토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전력난으로 낮경기가 많아졌던 2011시즌.

낮경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손목 부상이 겹치며 부진하다 7월, 지진의 여파로 인한 심리적 충격을 이유로 중도 포기.

 

이후 일본 생활에 대해 '팀도 동료도 없었다. 나는 한낱 용병이었을 뿐' 이라는 발언으로 일본에서는 인식이 나쁘다.

반대로, 당시 롯데의 주전 포수였던 사토자키는 '내가 본 외국인 중 팀/동료와 교류를 가장 안하려고 했던 선수' 라고 말했다.

 

 

이범호 2010 / 소프트뱅크 호크스

통산 48경기 4홈런 8타점

.226 .294 .355 OPS.649 wRC+ 77

 

2009시즌 이후 FA자격으로 소프트뱅크와 2+1년에 최대 5억엔 규모로 계약했다.

그런데 이미 소프트뱅크에는 주전 3루수 마츠다가 있었고, 마츠다에 비해 수비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아

지명타자나 대타로 주로 출전했다만... 타격에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새로운 용병 페타지니 영입에 2군행.

 

그리고 시즌 이후 구단과 상호 해지로 한국으로 복귀했다.

 

신성현 2009 ~ 2013 / 히로시마 카프

1군 출장 기록 없음.

 

덕수중학교 졸업 이후, 교토 국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일본 선수와 동일한 취급으로 NPB 드래프트에 참가했으며, 2008년 히로시마 카프 4라운드(전체41번) 지명

 

전체 41번이라고는 하나, 이 해는 드래프트 풀이 좋지 못해 12구단이 68명 지명으로 마감했던 드래프트였다. (육성 선수 제외)

5년간 2군에서 타율.213 OPS.591 수비도 백업. 특별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1군에 올라오지 못한채로 방출되었다.

 

이후 한국 독립 구단에서 활약한 이후, 2015년 5월 한화 이글스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현재는 두산 베어스에서 활약중.

 

 

이병규 2007 ~ 2009 / 주니치 드래곤즈

통산 265경기 28홈런 119타점

.254 .290 .386 OPS.676 wRC+ 84

 

2006시즌 이후 FA자격으로 3년 계약. 규모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첫 해부터 5번타자/중견수로 큰 기대를 받으며 시작했고, 시즌 초반에는 좋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약점이 공략되기 시작한건지, 점점 떨어지더니 최종적으로 타율 .262 OPS.665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

그래도 재팬 시리즈에서 쏠쏠한 활약을 하며 창단 71주년이었던 주니치의 2번째 우승에 일조했다!

 

후쿠도메가 메이저 진출을 한 2년차, 리그 최강 마무리 후지카와에게 유일한 1패를 안기는 라뱅쓰리런을 선사하기도 하며

시즌 16홈런 65타점을 기록했지만 타율 .254로 여전히 아쉬웠고

 

3년차에는 2군에서의 시간이 더 많았다. 그렇게 3년 계약이 끝나고 LG트윈스로 복귀했다.

 

 

이승엽 2004 ~ 2011 / 치바 롯데 마린즈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오릭스 버팔로즈

통산 797경기 159홈런 439타점

.257 .324 .494 OPS.818 wRC+ 120

 

「아시아 홈런 신기록의 사나이」 「국민타자」

 

2003년 시즌 이후 FA자격으로 치바 롯데 마린즈와 계약했다.

 

첫 해 타율 .240 14홈런 50타점, 큰 기대에 비해서는 아쉬운 성적으로 마감했지만 장외 홈런을 때리는 등 임팩트를 보였다.

 

2년차, 적응을 하며 궤도에 올라 30홈런을 때렸고, 재팬 시리즈에서는 한신을 상대로 6할 타율 3홈런을 기록하며

「33-4」 일명 하얀 안개 사건의 일등공신으로 31년만의 우승에 크게 일조했지만...

시즌 이후 구단과 재계약에 마찰이 생겨 롯데와는 이별하고

4년 30억엔 규모, 당시 일본 역대 최대 규모의 계약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다.

 

그리고 3년차, 자이언츠에서 맞은 일본 커리어하이 시즌.

전통과 관습이 강한 그 요미우리에서 4번타자를 맡으며 타율 .323 OPS 1.004, 41홈런 108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4년차 후반기부터 선구안과 포크볼에 약하다는 점을 철저히 공략당하며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고

5년차부터는 출장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2009시즌에는 재팬 시리즈 우승 반지를 얻긴했지만, 큰 활약은 없었다.

 

이후 오릭스로 건너가 국민 영웅 박찬호와 1년간 한솥밥을 먹기도 했지만

리그 타율 꼴찌(.201)라는 불명예 기록을 안고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했다.

 

 

 

이종범 1998 ~ 2001 / 주니치 드래곤즈

통산 311경기 27홈런 99타점 53도루

.261 .334 .406 OPS.740 wRC+ 105

 

1997시즌 이후 이적료 4.5억엔(당시 약 50억 원)이라는 큰 금액으로 주니치에 임대 형식으로 입단했다.

 

이적 첫 해, 초반에 엄청난 임팩트를 보였다.

용병답지 않은 친화력과 그라운드에서의 허슬플레이, 돈만 받으면 땡이라는 여타 용병들과는 다른 투쟁심도 보였다.

5월까지는 월간 MVP도 받으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지만, 6월부터 약점이 공략당하며 슬럼프에 빠지던 중

팔꿈치에 투구를 맞고 골절상으로 사실상 시즌 아웃. 성적은 67경기 타율 .283 OPS.873, 10홈런 18도루였다.

 

2년차에는 유격수가 아닌 외야수로 전향했지만, 시즌 내내 지지부진 하더니 막판에 성적이 떨어지면서

타율 .238 OPS.683, 9홈런 24도루로 부진.

 

3년차, 타율은 다시 끌어올렸지만 (.275) 홈런도 도루도 줄어들며 용병 치고는 애매한 입장이 되어버렸고

4년차, 대타와 대수비로만 출전하다 6월 1일, 구단과 상호 합의 하에 퇴단했다.

 

백인천 1962 ~ 1981

토에이~닛타쿠홈~닛폰햄 (구단명 변경) - 다이헤이요 라이온즈 - 롯데 오리온스 - 킨테츠 버팔로즈 

 

통산 1969경기 1831안타 209홈런 776타점 212도루

.278 .316 .430 OPS.746 wRC+113

 

「요시! 그란도 시즌!」

 

경동고등학교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서 활약하던 백인천은 1962년, 스카웃 제의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반일감정이 없어서는 안되는 그 시절에, 「젊고 훌륭한 선수가 해외에 나가서 많은것을 배워와야 한다」 라는 여론조사에서

국민 80%가 백인천의 일본 진출에 찬성했다. 그렇게 백인천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입단 초기에는 아직 일본어도 못했는데 포수를 맡게 되었다.

일본식 이름도 쓰지 않는 백인천을 못마땅해 하는 동료도 있었지만, 토에이 플라이어즈에는

1959시즌 신인왕 장훈(하리모토 이사오)가 있어 적응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이후 1963시즌부터 1군에서 자리를 잡았고, 1965시즌부터 외야수로 전향하며 꽃을 피웠다.

1970시즌에는 말도 안되는 볼을 스트라이크로 잡아주는 심판에게 죽빵을 선사했다가 징계를 먹기도 하는 등 사건사고도 많았지만

1975시즌, 리그 수위타자(타율 1위 .319)를 달성하며 타이틀도 얻으며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후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 소식에 일본에서의 기록 달성을 직전에 둔 채로 귀국하여 MBC 청룡의 원년 멤버가 되었고

그 해, 시즌 타율 .412 (72경기 250타수 103안타)를 기록하며, KBO 역사상 유일무이한 4할 타자로 남아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