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이휘소, 영어 이름은 벤자민 휘소 리
입자물리학자 겸 핵물리학자로써 엄청난 과업을 남긴 그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조선총독부
이휘소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절이었던 1935년 1월 1일에 경기도 경성부 부부 의사인 이봉춘과 박순희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게 된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상황 탓에 조선인은 번듯한 직장을 갖기 힘들었지만 이휘소의 출생배경은 비교적 유복했다.
이휘소가 7살이 되었을 때, 그는 사범 부속 제1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제1국민학교는 일본인들만을 위한 학교였지만 조선인의 입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것은 아니어서 이휘소는 부속제1국민학교에 시험을 쳐서 입학했다.
그리고 광복 2년 뒤, 명문학교였던 경기중학교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그가 중학교 4학년이 되던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박사는 마산으로 피난을 오게 된다.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온 경기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한다.
당연하게도 학창시절 우수한 학생이었던 이휘소는 1952년 검정고시를 무난히 합격한 뒤 입학 시험을 치르고 나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그런데
아~ 이거 아닌것같은데?
대학 수업을 한학기 받은 이휘소는 기초이론보다 응용화학에 치중되어있는 화학공학보다 물리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얼마 후 이휘소는 전공을 물리학으로 변경하기 위해 학교에 요청했지만 학교는 수차례 거절했고, 뛰어난 성적의 그는 주한미군 부인회가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54년에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로 유학(편입)가게 되었다.
이휘소는 1955년 1월에 오하이오주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 받았던 성적을 고려하여 모두 70단위가 인정됐는데, 70단위는 당시 미국 대학교 학제 기준 약 2년 반 정도에 해당하므로 3학년 과정에 바로 진학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지 1년 반 만인 1956년 6월에 이휘소 박사는 물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고, 학과장 등의 추천으로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렇다. 여름에 졸업했다)
이휘소는 여름방학이 끝난 1956년 8월부터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교육조교 장학생으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공학과와 의예과 학생들의 물리학 실험 TA(교육조교)를 담당했다.
이듬해 가을학기부터는 연구조교(Research assistant)와 TA를 겸하게 되면서 실험 지도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강의 하나를 배정받게 되었다. 이 무렵 이휘소는 물리학에서 본격적으로 입자이론물리학 전공을 희망하게 된다.
대학원 공부도 성실히 마친 이휘소 박사는 피츠버그 대학의 박사학위 자격시험에서 차석과 총점이 20점 이상 차이나는 점수로 수석 합격하게 된다. (다만 이 박사는 합격 이후 몸이 쇠약해져 기관지염으로 고생을 좀 했다...)
그러나 먼치킨인 이 박사는 몸을 추스른 후 바로 석사학위 논문에 매진하여 〈산란행렬의 해석적 특성과 그 응용〉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1달여만에 완성한다.. 그리고 이 논문으로 1958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휘소는 이미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진급을 앞두고 있었지만 시드니 메슈코프 교수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그를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클라인(Abraham Klein)에게 추천하게 된다. (참고로 펜실베니아 대학교는 그 유명한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한곳이다.)
클라인은 이휘소의 재능을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인 예비시험을 면제해주었으며, 혜택이 좋은 해리슨 연구장학금(Harrison Fellowship)을 주선해주기까지 했다.
(이휘소의 박사 학위 취득 당시 모습)
서른 셋의 의욕넘치는 젊은 교수였던 클라인은 이휘소와 함께 공동 연구를 수행한다. 이휘소는 1960년 11월에 〈K+ 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의 이중 분산 관계〉 논문으로 물리학 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일반적인 한국의 대학생이라면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학부 졸업을 앞둔 나이다.
1961년 2월 4일이었다. 박사 논문 디펜스가 끝난 11월부터 1961년 8월까지, 이휘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후연구원 및 전임 강사로 임용됐다.
이후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미국의 사설 연구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에 이주해 온 후 이곳에서 연구를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됐는데 그 임기는 1년이었다. 임기가 끝난 후부터의 직장 생활을 생각해야 했지만, 그는 클라인의 배려 덕분에 1961년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됐다.
조교수로 임용된 이휘소는 이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방문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어 임기 이후의 걱정을 덜 수 있게 된다.
(양전닝 박사)
그리고 4년이 지난 1965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양전닝은, 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석좌교수로 옮겨가게 되자, 이휘소에게 함께 뉴욕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1972년 10월에 박정희의 유신 헌법을 선포 이후, 이휘소는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한국인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강경식 전 브라운 대학교 교수는 당시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이었고, 가끔 모국 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의 연사 초청의 수락을 이휘소에게 권유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이휘소는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하곤 했다.
이휘소의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다. 그는 이 무렵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이휘소에게 박사 학위 논문 지도를 받고 있었고, 이휘소가 객원교수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있을 때에도 한 학기 동안 그를 따라가서 연구하기도 했다.
이휘소는 미국 시민이 됐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은 한시도 버리지 않았고 강주상과 함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에는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됐는데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고 강주상은 기억하고 있다.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휘소가 핵무기를 개발하다가 암살당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참고로 이휘소가 '핵'을 연구하기는 했다. 입자물리학자이자 핵물리학을 연구한 학자였으니... 다만 핵무기를 연구하지 않았을 뿐)
이휘소는 본인을 뉴욕으로 데려온 양전닝과 상의한 끝에 페르미 연구소로 이직하기로 했다. 그는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에 취임하면서 1974년 4월부터 시카고 대학교의 교수도 겸임하기로 했다.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재직하며 이휘소는 이곳에서 거의 모든 이론 연구에 관여하고 실험 계획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봉급은 페르미 연구소에서 받고, 시카고 대학교에서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로 했는데 이휘소만 원한다면 언제든 전임교수가 될 수도 있었다.)
참고로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는 1966년 8월 31일부터 이휘소를 휴직 처리해주며 1974년 9월 25일부터 물리학과 선도 교수에 임용하는 대우를 해주어그를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대신하기도 했다.
1974년에 이휘소는 영국 런던에서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하였다.
이 무렵 와인버그의 1967년 논문은 상당히 유명해져서 전약 이론은 일반적으로 '와인버그 이론'이라고 불렸지만, 이 회의에서 이휘소는 전약 이론에 대한 압두스 살람의 공헌을 인정하고 자신의 발표에서 이 이론을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 불렀다.
그러자 이후 학계에서는 이휘소의 명명을 존중하여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됐고, 이 덕에 압두스 살람은 스티븐 와인버그, 셸던 글래쇼와 함께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된다.

그는 사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받았으며, 2006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 의해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


현대물리학이 낳은 천재 중 한명, 이휘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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